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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일

번역 준비

삐삐밥줄 2018. 11. 12. 22:29
지금의 직장에 들어오기 전에 일을 주던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하고 싶조... 전에 해본 일이라 더 하고 싶조... 큰 건이라 더 하고 싶조...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서 밥 밀어넣고 하루 5시간씩 번역하고 주말에 풀로 번역하면 어떻게든 마감 맞출 수 있을 것 같길래 하겠다고 했다.
패키지 뜨기 전에 얼른 트라도스 잘 돌아가는지 확인부터 다시 하고 뭐가 안 맞아서 업뎃 안 된 기존 메모리 업뎃도 하고, 설정 다시 확인하고 기존 번역 파일 메모리에 다 들어갔는지도 다시 살짝 살펴 보고 사전 등 환경도 다시 확인하고...

역시 번역이 설레고 재미있다
할 땐 내 안의 문학요뎡이 허접한 어휘력에 시비를 걸어서 하는 내내 개빡치지만 하고 나면 보람 차조... 뭔가 해낸 느낌이 있조... 누가 너 뭐 했냐 물어보면 답해줄 수 있조...
정규직이 맘이 편하긴 한데 내가 대체 무슨 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다. 지원업무가 다 그렇지만 잡일의 끝을 보는 느낌이다. 아닐 때도 있지만 바쁠 땐 정말 바쁜데, 그렇게 바빠도 누가 뭐하느라 바쁘냐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궁색하다는 점이 전문분야가 애매한 순수인문학 전공자 출신의 지원부서 짜잔이1의 큰 불안요소인 듯. 이대로 10년 정도 일하다가 회사에서 팽 당하거나 내가 못 견디고 뛰쳐나갔을 때,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딱히 뭐가 없다...
20~30대까진 지원부서 짜잔이1도 괜찮다. 눈만 낮추면 경력 이직도 어렵지 않고... 근데 40부턴 경쟁에서 도태될 것 같다. 회계나 법무처럼 자기 분야가 확실히 있는 사람들은 신 아니고 짜잔이라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빽에서 지원만 하던 인사나 총무(라고 쓰고 잡무라고 읽는)같은 전문적이라고 하기에 뭔가 애매한 부서(각종 영업은 여기 포함 ㄴㄴ)의 경우의 탑을 제외한 짜잔이들은 현직장에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누구도 원하지 않는 애매한 인재가 되는 것 같다. 대학 다닐 땐 지원부서가 제일 괜찮아보였는데 아니조... 실제로 일해보면 제일 전문성 없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조... 수능 1~2등급 선이면 대졸 아니라 고졸이라도 아무나 데려다 3개월만 굴리면 다 비슷하게 하조... 그래서 이대로 가면 내가 그렇게 될 것 같고...
마감 때문에 밤샘하는 일도 없고, 프로젝트성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매일이 루틴하고 안정적이다. 초기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익숙해지니 몸도 맘도 편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제외하면 현재는 편하기 그지없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될지 하는 고민도 초기에만 심각했지 어느 순간부터 흐려져서 생각 없이 다니고 있었는데 PM의 한 마디에 갑자기 영면에 들기 직전이던 경각심이...!


잘 생각해보면 번역을 전업으로 할 땐 영업이 너무 힘들었다. 다른 건 다 좋았는데 영업이 시발이었어오... 에이전시 안 끼고 직거래하면 돈 많이 받고 좋을 것 같았는데 아니조... 에이전시에 나를 영업하는 것조차 피곤한데 고객 하나하나 직접 영업하면 정신력 마이너스 찍고 얼마 못 가 뻗을 것...
대학 갓 졸업하고 정규직 찾아헤맬 때도 면접이 너무 큰 스트레스였는데, 프리랜서는 업체 몇 곳 잡기까진 매일이 면접 느낌에 업체 잡아도 계속해서 신규 업체를 찾아둬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쩐다. 정규직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안함과 고통... 에이전시나 고객과 나는 언제든지 빠빠이 할 수 있는 사이라서 예비용 카드를 항상 챙겨둬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영업해야 한다. 근데 내가 영업 인재면 애초에 회사원이라도 미래가 이렇게 깜깜하진 않았겠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이 있다는 것 하나가 좀 크긴 한 것 같다. 번역할 땐 전문 분야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잡무... 말곤 정의할 방법이 없다... 고통... 정신적 고통... 몸은 편한데 맘이 불편한 이 고통... 배부른 고통이지만 앞이 깜깜하다.

그래서 촉박한 데드라인이지만 이번 건 수임해서 해보고 내 미래를 한 번 더 고민해보려고 일단 받았다.
이전엔 데드라인 전에 미리 끝내서 몇 차례 반복해서 결과물 확인하고 용어 확인하고 pm한테 미리 보내줬는데 이번엔 좀 아슬아슬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속도가 느린 편이라 하루 캐퍼 확인부터 했는데 진짜 겨우 맞출 듯... 패키지를 일찍 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을 테니 주말에 죽었다 생각하고 하는 수밖에 없겠다. 트라도스 태그 오류가 왠지 나한테 시발이라 걔랑 타협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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