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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덕질: 룩덕

탈색인의 비애 1

삐삐밥줄 2018. 4. 17. 20:54
누렁이 라이프가 길어지면서 이전까지 깨닫지 못한 다양한 불편함을 알게 된다.
지난 달, 하루는 저녁 식사를 하러 교수님과 조용히 대화하며 걷고 있는데, 지하철 출구 앞에 서있던 자칭 애국 단체 소속인 것 같은 할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더니 지저분한 쌍욕을 하시더라. 머리가 하얗다는 게 그 할아버지에겐 창기나 매국노와 동일한 의미로 보였던 건지 그 두 방면의 다채로운 쌍욕을 큰 소리로 선보이셨다. 교수님께서 관련해서 뭔가 말씀하려고 하시는데, 내가 교수님 보기 민망하고 어이도 없고 해서 허허.. 하고 웃으면서 교수님께 먼저 다른 말씀을 드리며 지나쳤다.
보통 사고면에서 어디 한 곳이 고장난 남성 노인분들이 하는 막말에는 복장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쓰면서 생각해보니, 검은 머리, 단정한 단발, 평범한 교복차림의 애들한테도 그러는 걸 보면 그냥 여자면 다 마땅찮은가 싶기도 하네... 여하튼, 이 잡문을 쓰기 전까지의 나는 특별히 이에 대해 의식하고 생각해본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그들은 젊은 여자가 만만한 거다. 지하철에만 타도 젊은 여자만 타겟으로 시비 털기를 시전하는 이상한 남성 노인은 생각보다 흔하게 볼 수 있고 그 타겟들은 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다. 나도 관종색이 좋은 거지 관종템을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아니라서 백에 구십구는 눈에 안 띄고 단정한 기본템을 두르고 다니기 때문에 탈색 전에는 정말 존재감이 없는, 흔하디 흔한 지나가는 행인 1이었는데, 떠올려보면 그 때도 미친 남성 노인으로부터의 이유 없는 시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왜 남성 노인만 그러는 건지는 알 듯 말 듯 한데, 이 글에서 쓰고 싶은 건 이게 아니라 지난 달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일을 겪고 교수님이랑 반주를 좀 격하게 하고 집에 돌아와서 그 일화를 꺼내며 동생에게 머리를 다시 까맣게 물들일까 물었는데, 현명한 내 동생은 어짜피 시비 털 놈은 누나 머리가 까매도 시비 걸 거라면서 그런 것에 휘둘리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머리 때문에 첫 인상이 다가오기 힘든 인상이었다는 말도 들었어서 내친 김에 그것도 말하며 얻는 것(작은 자기 만족)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큰 것은 아닐까라고도 물었는데, 동생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가는 것이 반대의 경우보다 낫고 첫 인상에서 잘려나갈 사람이면 오래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어짜피 오래 볼 사람이라면 처음 마이너스 되었던 건 별 상관이 없다고 했다.
조금 놀랐다. 동생의 말을 듣고 나서 흑발이건 백발이건 내 마음이 내킬 때, 내키는 색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의 말처럼 '오래' 볼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 신경 쓰고 나를 맞출 필요가 없는데 흔들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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